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란토 공습 (문단 편집) === 반쪽짜리 승리 === 그러나 영국 해군은 당초 기대했던 목표, "이탈리아 해군의 활동 위축"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비록 전함 3척이 날라갔다고는 해도 전함은 아직 3척이 남았고 무엇보다 중순양함이 6척이나 살아있었기에 이탈리아 해군의 활동은 위축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타란토 공습 이후 불과 5일 만에 이탈리아 해군의 노련한 제독 [[이니고 캄피오니]](Campioni) 제독이 전함 2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4척의 대함대를 꾸려 출격. 몰타행 영국 호송선단을 방해하는데 성공했다.(스파르티벤토곶 해전) 결과적으로 타란토 공습은 추축국의 아프리카 호송선단 저지 임무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는 리비아 행 호송선단을 증가시켰다.[* Bragadin, Italian Navy in World War II, p. 356.] 또한 이탈리아는 1년 뒤 이탈리아 해군 잠수정 쉬레(Scire)에 탑승한 [[Decima Flottiglia MAS|제10강습부대]]가 알렉산드리아 해군 기지에 침투하여 영국 지중해 함대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와 밸리언트(HMS Valiant)]]를 대파하여 복수를 성공한다. 이게 바로 [[인간어뢰]] 작전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습격]] 사건이다. 이후 두 전함은 각각 9달, 6달씩 전투불능에 빠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의 실패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습격(Raid on Alexandria)가 더 뼈아프다고 보았다. 비록 타란토에서 이탈리아 전함을 주저앉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의 전함도 똑같이 무력화되면 전략적 우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실제 타란토 공습 이후 이탈리아는 패기 넘치게 계속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보급을 하면서도 몰타섬으로 가는 영국 수송선단을 잡아내기도 하는 여유있는 척을 했지만, 반대로 영국은 항구에서 무력화된 전함 2척이 멀쩡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고 한다.[* 다만 이탈리아는 바로 위의 본토에서 수리하면 되지만 영국은 일단 지중해에서 벗어나 수리를 해야하니 상황이 같다고 볼 수 없긴 하다.] 결국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영국은 지중해 전체의 제해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그나마 [[1941년]] [[마타판곶 해전]]에서 [[차라급 중순양함|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을 거의 손실없이 잡는 대승을 거두면서 2개월 정도의 평화(?)를 얻긴 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크레타 섬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을 통해 독일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이탈리아 해군도 자국 공군과 독일군과 협력하여 영국군의 호송 작전을 다시 방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국 해군 당국은 타란토 공습이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해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녹아웃을 먹이는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Caravaggio, A.N, Lieutenant Colonel, 'THE ATTACK AT TARANTO: Tactical Success, Operational Failure', Naval War College Review, 1997.] 그리고 1년 뒤, 영국 해군은 Z 함대를 싱가포르에 보내기 위해 함대를 구성하면서, 타란토 공습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탓에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어 처칠의 안을 수용하고, 이로 인하여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 중 하나인 [[말레이 해전]]이 벌어진다. 이에 격분한 영국 수뇌부는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기 위해 몰타를 사수하라고 지시하였고, 제 3차 [[몰타 항공전]]의 막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처칠은 3차 몰타 항공전 내내 북아프리카에서 방어전을 고수하던 오킨렉을 잘라버리고[* 군인으로서는 좋은 판단이었을지 모르나, 지중해 항로를 다시 열어야하는 전시 내각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해롤드 알렉산더와 [[버나드 몽고메리]]를 부임시킨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타란토 공습 이전 항공 어뢰 전문가들은 적어도 수심 23미터가 확보되어야 선박에 대한 어뢰 공격이 가능하다고 평가했었다. 타란토 항구의 수심은 12미터에 불과했으나, 영국 해군은 어뢰가 지나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타란토 공습을 면밀히 연구해서 이듬해 미 해군을 겨냥한 [[진주만 공습]]에 백분 활용했다. 특히 어뢰가 과도하게 잠수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나 미국 해군의 예상 출격범위 밖에서 출격을 감행한 것 등등. 다만 진주만 공습은 미군의 삽질도 어느정도 적용했다.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